기사제목 [명성희 팝페라가수] “모두의 마음 하나로 모은 ‘아름다운 통일‘ 실현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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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희 팝페라가수] “모두의 마음 하나로 모은 ‘아름다운 통일‘ 실현되길”

코리안 드리머
기사입력 2019.08.3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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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명성희 팝페라가수

지난 8월 15일 광복 74주년을 맞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통일실천시민대회’의 첫 무대에 팝페라 가수 명성희 씨가 올랐다. 모든 행사의 개막을 알리는 애국가 제창을 명 씨가 독창으로 이끈 것이다. 그의 무대가 특히 이목을 끈 이유는 그가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은 탈북민 출신이란 배경 때문이다.

통일을 기원하는 2만여 명의 관중들이 가득 들어찬 공연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영예를 안게 된 명성희 씨는 "나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져 너무 영광이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강한 자긍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전했다. 

명 씨는 전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고 과거 남북통일축구대회(1990) 당시에도 서울을 방문해 북한대표팀을 지휘했던 명동찬 감독과 조선인민군협주단, 호위국협주단 등을 거치며 가극배우로 활약했던 공훈배우 박윤희 씨의 장녀이기도 하다. 소위 북한에서 엘리트층이라 불리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자란 그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뒤 평양영화방송음악단 단원(2000~2003)으로도 활동하다 2004년 어머니, 동생과 함께 국경을 넘어 남한 땅을 밟았다. 

북한에서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 그에게 탈북 계기를 묻자 
"자유로운 음악 세계가 없었다.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게 고통이었다."고 밝히며 한국에 온 후 달라진 그의 음악 인생을 소개했다.
인터뷰·글 허경은


‘자유’를 노래하는 가수

"북한에서는 사실상 국가를 자주 부르지 않습니다. 주로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와 같은 가사가 담긴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주체 사상, 수령 찬양의 노래들을 부르죠. 한국에 와보니 애국가를 자주 부르더군요. 그런데 그 가사 하나하나가 너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정말 이 땅은 하느님이 보우하여 그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이렇게 빨리 부흥하고 경제 대국이 되었구나 싶어 부를 때마다 울컥 하였습니다." 

01ss.jpg▲ 8월 15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통일실천축제한마당'에서 팝페라 가수 명성희 씨가 '애국가' 독창을 부른 후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하고 있다.
 
명 씨는 지난 ‘통일실천축제한마당’ 무대에서의 애국가 독창이 왜 이토록 자신에게 의미있는 무대였는지를 설명하며 다시 한번 주최측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KBS<열린음악회>·<남자의 자격>, TV조선<모란봉클럽>·<강적들>, 채널A<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을 비롯, 북한 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각종 뉴스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며 방송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그의 예술적 재능을 뽑내기 위해 출연했던 SBS<스타킹> 출연 모습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4년 ‘스타킹’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했었습니다. 당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궁전에 갇힌 황후가 자유를 갈망하며 부른 ‘나는 나만의 것’이란 노래를 선택해 불렀었는데 가사 하나하나가 마치 모든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연습하면서도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새장 속 새처럼 살아갈 수는 없어 / 난 이젠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래 / 내 인생은 나의 것 / 나의 주인은 나야 / 난 자유를 원해...' 노래 가사가 그가 이 곡을 선택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SBS스타킹_375회_20140719(2).jpg▲ 2014년 명성희 씨가 방송 출연을 통해 뮤지컬 '엘리자벳' 삽입곡 '나는 나만의 것'을 부르는 모습 (출처=SBS스타킹 375회 방영분 화면 캡쳐)
 
“북한에서는 무엇 하나도 자유롭게 할 수 없죠. 헤어스타일도 복장도 내가 하고싶은대로 할 수 없고 이동의 자유도 없습니다. 탈북을 결심하고 몰래 국경 지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수십차례 통행증 검열을 받았습니다. 신분의 좋고 나쁨에 구분없이 북한 주민들은 모두 노래 가사처럼 새장 속에 갇힌 새와 다름이 없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가족 

90년대 중반이 넘어가며 명 씨의 가족들에겐 힘든 시련이 닥쳤다. 1995년 그의 외가 친척들이 금전적 누명을 써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의 부친인 명동찬 감독은 간암으로 투병하다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저의 이모는 당시 외화벌이를 하며 큰 공을 세웠지만 누군가의 모함으로 누명을 써 요덕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면서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 친척들이 모두 끌려갔죠. 사촌 언니는 평양음악무용대 피아노학과를 졸업했고 사촌 오빠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후 쿠바 유학도 다녀온 수제였습니다. 이모와 사촌언니는 이송 도중 그 억울함에 자살했다고 전해들은 게 전부입니다. 당시 장성택 위원장이 북한 축구를 성장시키기 위해 아버지를 자주 찾아와 술친구가 될 정도로 가까워, 아버지가 그 분께 할머니만이라도 풀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엄마까지 데려가려던 것을 막아준 게 그나마 다행이었죠. 쇠약한 몸으로 수용소에 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지난 2013년 북한의 장성택 처형 사건은 전 세계인을 경악케 했다. 북한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면서 동시에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부라는, 소위 '2인자' 위치에 있던 그가 조카의 손에 운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명 씨는 놀라울 게 없다는 듯이 “장성택도, 그 어떤 고위층도 북한에서는 수령의 한마디에 목숨을 달리할만큼 힘이 없습니다. 그런 곳이 북한입니다.”라고 말했다.  

“제가 더더욱 노래로 성공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친척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면서부터입니다. 돌이켜보면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장군님께 기쁨을 드려서' 이모 가족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해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이모의 배경 때문에 오디션마다 떨어지고, 왕재산경음악단 오디션도 최종라운드를 통과해 남산병원(북한 차관급 이상, 인민배우 등 고위층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곳) 신체검사까지 마쳤지만, 마지막 단계인 문건(신원)조회에서 이모의 배경이 다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많은 좌절로 우울증에도 걸려 심지어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었죠.”

그러던 중 명 씨는 평양 영화방송음악단 오디션을 보게 됐다. 장르 특성 상 한국, 일본, 러시아 등 외국 노래로 오디션을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인 'My heart will go on'(셀린 디온)을 부른 명 씨의 파격적인 선곡과 재능에 높은 평가가 내려져 최종 합격을 하게 됐다.

남북의 장점 접목된 새로운 국가를 꿈꾼다

마침내 노래하는 삶을 살게 됐지만 더 넓은 음악 세계,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결국 명 씨 가족들을 남한행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를 통해 외부 세계를 듣긴 했지만 제 피부로 느껴본 적은 없었기에 먼저 확인을 해보고자 중국 주재 북한식당 근무를 지원하게 됐습니다. 이모 배경이 있어 해외에 나가기 어려웠지만 제 노래 실력을 바탕으로 보증을 서주신 분들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 중국에 있으면서 종종 국적을 묻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더군요. 한번은 한국(남한)인이냐고 물어와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나는 한국을 좋아한다.’라며 반겼습니다. 그런 반응을 보며 스스로 남북을 비교하게 됐고 외부 세계에서 어떤 인식을 갖고 우리를 바라보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부러웠죠. 외국인들이 이렇게 좋아하고 인정하는 나라라면 얼마나 발전했고 살기 좋은 곳일까. 그런 대한민국의 위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채널A_2.jpg▲ 명성희 씨가 방송을 통해 중국 내 북한식당 근무 경험을 소개하는 모습 '(출처=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239회 방영분 화면 캡쳐)
 
중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북에 돌아간 그는 어머니, 동생을 이끌고 바로 탈북을 실행에 옮겼다. 북한에서 음악적 재능을 갈고닦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명 씨이지만 한국에 와서도 대학(서울예대 실용음악과) 공부를 새롭게 마쳤다.      

“북한에서 팝 장르를 다루긴 했지만 한국에서 R&B, 힙합, 랩 등 신선한 장르들이 대중화돼있는 것을 보며 스스로 많이 뒤쳐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잖아요. 한국에 왔으니 한국인들이 즐기는 음악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제게 딱 맞는 '팝페라'를 만나게 됐죠. 한 때 주변 권유로 트로트 앨범을 내본적도 있지만, 역시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 되겠더라구요. 클래식은 ‘배고픈 음악’이라고 말리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

명 씨는 지난 2015년 새 희망을 염원하는 노래 '오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부른 '제발' 등이 담긴 팝페라 앨범을 발매했다. 모든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이자 고향을 떠나 온 모든 실향민·탈북민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울면서 녹음을 했다고 전하는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쟈켓.jpg▲ 2015년 발매된 명성희 팝페라 앨범 자켓 커버
 
팝(pop)과 오페라(opera)가 접목된 크로스오버 형태의 팝페라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클래식의 틀을 벗어나 보다 자유분방하게 노래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하나의 퓨전 장르이다. 두 장르의 장점을 접목해 새롭게 태어난 팝페라처럼, 훗날 남과 북이 합쳐져 하나의 국가가 탄생했을 때 우리는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 앞에 설 지 기대하게 되는 대목이다.

지금은 다가올 희망을 노래하는 명성희 씨가 통일의 날을 맞아 기쁨과 환희를 부르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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